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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왜 밤마다 어둠속에 모여 있는가 저 청년들의 욕망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의 쾌락은 왜 같은 종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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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전스/읽기 2010. 2. 23. 14:34

가재미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 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 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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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전스/읽기 2010. 2. 23. 14:01

키티는 외친다


키티는 외친다

황병승


장님이 되고 싶어! 거리에서 만난 내 친구 키티는 매독을 앓죠 주말의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달려요 더 빨리 더 빨리 느린 건 질색이야 귀가 떨어져라 외치는 키티 우리의 몸이 나쁘게 변해가고 있어요 지구가 돌기 때문이죠 달님을 보세요 해님을 구름과 호수를 저 느림보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일찍부터 호기심을 버렸고 나는 당신이 왜 우는지 알아요

우리는 약간의 도움이 필요해요 더 나빠지기 전에 더 빨리 더 빨리 장님이 되는 게 소원인 내 친구 키티는, 밑구멍에서 박하가 녹는 것 같아! 진물이 흐르죠 아무 것도 보지 않으려면 아무 것도 듣지 않으려면 더 빨리 더 빨리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언덕을 내려가요 느림보들의 충고는 듣지 않겠어요 지구에는 쓸모 없는 것들이 너무 많죠 한 장의 흑백사진이면 충분할 것을

돈 밖에 모르는 엄마는 안녕히 가시라고 그래요 내 다리와 두 팔을 자기 맘대로 하고 싶은 이도 저도 아닌 아빠 밤낮 인형놀이나 하자고 보채고 외국인 클럽에서 산 흰 가루를 킁킁거리며 오빠는 두 번 다시 듣기도 싫은 갓 스피드"에 빠져 지내죠 우리는 약간의 도움이 필요해요 우리의 몸이 이상하게 변해가고 있어요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어색한 건 없죠 더 빨리 더 빨리 페달을 밟아 이 느림보 친구야 키티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나는 당신이 왜 우는지 알아요 세상의 어떤 노래도 당신을 위로하지 못하고 아주아주 똑똑한 아저씨들조차 지구를 멈추진 못해요 더 빨리 지구보다 더 빨리 나도 모르게 늙을래! 바보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내 친구 키티 날마다 새 빌딩들이 들어서고 도시는 거대해져요 밤은 낮보다 환하고 사람들은 점점 세련되어져 가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죽음은 느리게 회전하고 있고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우리는 약간의 도움이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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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전스/읽기 2010. 2. 23. 14:00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이성복


어느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벼는 잠들지 못 한다 어느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고관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 어느날 갑자기 새는 갓낳은 제 새끼를 쪼아먹고 카바레에서 춤추던 유부녀들 얼굴 가린 채 줄줄이 끌려나오고 어느날 갑자기 내 친구들은 고시에 합격하거나 문단에 데뷔하거나 미국으로 발령을 받는다 어느날 갑자기 벽돌을 나르던 조랑말이 왼쪽 뒷다리를 삐고 과로한 운전수는 달리는 버스 핸들 앞에서 졸도한다

어느날 갑자기 미류나무는 뿌지채 뽑히고 선생은 생선이 되고 아이들은 발랑까지고 어떤 노래는 금지되고 어떤 사람은 수상해지고 고양이 새끼는 이빨을 드러낸다 어느날 갑자기 꽃잎은 발톱으로 변하고 쳐녀는 양로원으로 가고 엽기 살인범은 불심 검문에서 체포되고 어느날 갑자기 괘종시계는 멎고 내 아버지는 오른팔을 못 쓰고 수도꼭지는 헛돈다

어느날 갑자기 여드름 투성이 소년은 풀 먹인 군복을 입고 돌아오고 조울증의 사내는 종적을 감추고 어느날 갑자기 일흔이 넘은 노파의 배에서 돌덩이 같은 태아가 꺼내지고 죽은 줄만 알았던 삼촌이 사할린에서 편지를 보내 온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옆집 아이가 트럭에 깔리고 축대와 뚝에 금이 가고 월급이 오르고 바짓단이 튿어지고 연꽃이 피고 갑자기, 한약방 주인은 국회의원이 된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갑자기, 좆이 서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주민증을 잃고 주소와 생년월일을 까먹고 갑자기,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풀섶 아래 돌쩌귀를 들치면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이 꼬물거리며 죽은 지렁이를 갉아 먹고 얼마나 많은 하얀 개미 알들이 꿈꾸며 흙 한점 묻지 않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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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입이 없는 것들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성복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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