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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왜 밤마다 어둠속에 모여 있는가 저 청년들의 욕망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의 쾌락은 왜 같은 종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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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전스/읽기 2011. 2. 14. 14:33

세월에 대하여

이성복

1
석수의 삶은 돌을 깨뜨리고 채소 장수의 삶은
하루 종일 서 있다 몬티를 닮은 내 친구는
동시상영관에서 죽치더니 또 어디로 갔는지
세월은 갔고 세월은 갈 것이고 이천 년 되는 해
아침 나는 손자를 볼 것이다 그래 가야지
천국으로 통하는 차들이 바삐 지나가고
가로수는 줄을 잘 맞춘다 저기, 웬 아이가
쥐꼬리를 잡고 빙빙 돌리며 씽긋 웃는다

세월이여, 얼어붙은 날들이여
야근하고 돌아와 환한 날들을 잠자던 누이들이여


2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이마에
뱀딸기꽃이 피어 오르고 그건 대부분
환영이었고 때로는 정말 형님이 아들을 낳기도
했다 아버지가 으흐허 웃었다 발가벗은
나무에서 또 몇개의 열매가 떨어졌다 때로는
얼음 깔린 하늘 위로 붉은 말이 연탄을
끌고 갔다 그건 대부분 환영이었고 정말
허리 꺾인 아이들이 철 지난 고추나무처럼
언덕에 박혀 있기도 했다 정말 거세된
친구들이 유행가를 부르며 사라져 갔지만
세월은 흩날리지 않았다 세월은 신다 버린 구두
속에서 곤한 잠을 자다 들키기도 하고
때로는 총알 맞은 새처럼 거꾸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으흐허 웃고만 있었다 피로의 물줄기를
타넘다 보면 때로 나는 높은 새집 위에서
잠시 쉬기도 하였고 그건 대부분 환영이었다.


3
세월은 갔고 아무도 그 어둡고 깊은 노린내 나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몇 번인가 되돌아온
편지 해답은 언제나 질문의 잔해였고 친구들은
태엽 풀린 비행기처럼 고꾸라지곤 했다 너무
피곤해 수음을 할 수 없을 때 어른거리던
하얀 풀뿌리 얼어붙은 웅덩이 세월은 갔고
매일매일 작부들은 노래 불렀다 스물 세 살,
스물 네 살 나이가 담뱃진에 노랗게 물들 때까지
또 나는 열 한 시만 되면 버스를 잡아 탔고

세월은 갔다 봉제 공장 누이들이 밥 먹는 30분 동안
다리미는 세워졌고 어느 예식장에서나 30분마다
신랑 신부는 바뀌어 갔다 세월은 갔다 변색한
백일 사진 화교들의 공동묘지 싸구려 밥집 빗물
고인 길바닥, 나뭇잎에도 세월은 갔다 한 아이가
세발 자전거를 타고 번잡한 찻길을 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불쌍했고 어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고 울었다 아무 것도 그 비리고 어지러운
숨 막히는 구멍으로부터 돌아오지 못했다


4
나는 세월이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곱게곱게 자라왔고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들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그 어려운 수업시대, 욕정과 영웅심과
부끄러움도 쉽게 풍화했다 잊어버릴 것도 없는데
세월은 안개처럼, 취기처럼 올라온다
웬 들 판 이 이 렇 게 넓 어 지 고
얼마나빨간작은꽃들이지평선끝까지아물거리는가


그해
자주 눈이 내리고
빨리 흙탕물로 변해 갔다
나는 밤이었다 나는 너와 함께
기차를 타고 민둥산을 지나가고 있
었다 이따금 기차가 멎으면 하얀 물체가
어른거렸고 또 기차는 떠났다...... 세월은 갔다

어쩌면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돌아서
출렁거리는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갈 때

너는 발을 동동 구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너를 사랑했다
나는 네가 잠자는 두 평 방이었다
인형 몇 개가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고
액자 속의 교회에서는 종소리가 들리는......
나는 너의 방이었다
네가 바라보는 풀밭이었다
풀밭 옆으로 숨죽여 흐르는 냇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문득 고개를 떨군 네
마음 같은,
한줌
공기였다)

세월이라는 말이 어딘가에서 나를 발견할 때마다
하늘이 눈더미처럼 내려앉고 전깃줄 같은 것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본다 남들처럼
나도 두어 번 연애에 실패했고 그저 실패했을
뿐, 그때마다 유행가가 얼마만큼 절실한지
알았고 노는 사람이나 놀리는 사람이나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세월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 갔고 나는 또 몇 번씩
그 비좁고 습기 찬 문간을 지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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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전스/읽기 2011. 2. 4. 14:41

편지

이성복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 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 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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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전스/읽기 2010. 11. 4. 21:19

그날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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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전스/읽기 2010. 2. 23. 14:00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이성복


어느날 갑자기 망치는 못을 박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벼는 잠들지 못 한다 어느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고관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 어느날 갑자기 새는 갓낳은 제 새끼를 쪼아먹고 카바레에서 춤추던 유부녀들 얼굴 가린 채 줄줄이 끌려나오고 어느날 갑자기 내 친구들은 고시에 합격하거나 문단에 데뷔하거나 미국으로 발령을 받는다 어느날 갑자기 벽돌을 나르던 조랑말이 왼쪽 뒷다리를 삐고 과로한 운전수는 달리는 버스 핸들 앞에서 졸도한다

어느날 갑자기 미류나무는 뿌지채 뽑히고 선생은 생선이 되고 아이들은 발랑까지고 어떤 노래는 금지되고 어떤 사람은 수상해지고 고양이 새끼는 이빨을 드러낸다 어느날 갑자기 꽃잎은 발톱으로 변하고 쳐녀는 양로원으로 가고 엽기 살인범은 불심 검문에서 체포되고 어느날 갑자기 괘종시계는 멎고 내 아버지는 오른팔을 못 쓰고 수도꼭지는 헛돈다

어느날 갑자기 여드름 투성이 소년은 풀 먹인 군복을 입고 돌아오고 조울증의 사내는 종적을 감추고 어느날 갑자기 일흔이 넘은 노파의 배에서 돌덩이 같은 태아가 꺼내지고 죽은 줄만 알았던 삼촌이 사할린에서 편지를 보내 온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옆집 아이가 트럭에 깔리고 축대와 뚝에 금이 가고 월급이 오르고 바짓단이 튿어지고 연꽃이 피고 갑자기, 한약방 주인은 국회의원이 된다 어느날 갑자기, 갑자기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고 갑자기, 좆이 서지 않는다

어느날 갑자기 주민증을 잃고 주소와 생년월일을 까먹고 갑자기,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풀섶 아래 돌쩌귀를 들치면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이 꼬물거리며 죽은 지렁이를 갉아 먹고 얼마나 많은 하얀 개미 알들이 꿈꾸며 흙 한점 묻지 않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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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전스/읽기 2010. 2. 23. 14:00

아, 입이 없는 것들

 아, 입이 없는 것들

이성복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어두워진다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가득한 것들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아, 입이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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